• 말씀을 듣기 전에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 이스라엘은 350년간의 암흑기로 빠져들어갑니다. 여호수아와 가나안을 정복하던 세대가 죽자,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수아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다’(2:10, 24:31)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서에서는 하나님을 순종하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여 땅을 정복했습니다. 그러나 사사기에서는 백성들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불순종과 우상숭배에 빠져 번번이 패배하고 맙니다. 죄에 빠졌다가 구원을 얻는 과정이 일곱 번이나 반복되는 가운데서 사사기는 이스라엘이 얼마나 하나님의 율법을 도외시하고, 그 대신에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행하였는가를 보여줍니다. 이 일곱 번의 순환과정은 5단계 죄를 지음, 정복당함, 간구함, 구원받음, 침묵입니다. 이 단계들은 각기 모반, 징벌, 회개, 복구, 안식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런 일의 반복 속에서 교훈을 얻을 줄도 모르고 계속해서 순종과 배교 사이를 오갑니다. 이처럼 사사기는 이스라엘의 타락에 대한 묘사로 시작하여, 압박과 구원이 반복되는 일곱 번의 순환 과정으로 이어지며, 이스라엘의 부패상에 대해 두 가지 예증을 함으로써 결말을 맺고 있습니다(17:1-21:25). 즉 종교적 배도(17-18)와 사회적. 도덕적 부패(19-21)입니다. 사사기는 이 시대를 이해하는 핵심적인 말씀,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이제 이 말씀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그 결과가 어떠했는가를 살펴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삶이 얼마나 비참하고 실패한 삶인가를 마음에 새기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삶으로 승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1> 이스라엘의 타락의 원인입니다(1:1-3:6).  본문 1:1-3:6절을 보십시다. 먼저 이스라엘이 타락한 원인을 살펴봄으로써 이들이 각각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근원적인 이유를 알 수 있기에 이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사사기의 2장 전체를 같이 읽겠습니다. 2장은 사사기 전체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장은 경건한 세대로부터 불경건한 세대로 바뀌는 과정과 순환과정의 형식, 그리고 가나안 족속을 멸하지 않으시는 데 대한 하나님의 목적 등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사기 초두에서 이스라엘은 여호수아의 죽음 이후 잠간 동안 군사적으로 승리를 거둡니다. 그 이후 줄곧 패하여 대적들을 내쫓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거민들을 몰아내지 못합니다(1:19, 21, 27-36). 왜 그들은 가나안인들을 다 쫓아내지 못했을까요? 어쩌면 우리는 버려야 할 나쁜 것인 줄 알면서도, 그것에 대한 오랜 애착과 버릇 때문에 계속 유지하고 있는 여러 가지 습관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과감하게 버리지 못하고, 계속 즐기기 위해 여전히 지니고 있습니다. 과거에 이스라엘 지파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이 가나안 종족들을 쫓아낼 수 있을 만큼 강하게 되었을 때에도, 그들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그들을 철저하게 쫓아내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자신들의 생활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 가나안 사람들을 자기들 곁에 가까이 두고 일을 하도록 했습니다. 문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영적으로 충분히 강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이교도인 가나안 사람들은 점차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이스라엘에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키게끔 되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가나안 거민들로 인하여 만연되는 종교적 도덕적인 암을 제거하지 못하고, 그 병에 걸리고 맙니다. 가나안의 신들은 문자 그대로 그들에게 올무가 됩니다(2:3). 그러므로 이 사실을 직시합시다. 현실적으로 우리는 결코 충분히 강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못된 습관들을 우리 삶 밖으로 완전히 쫓아낸다면, 우리는 훨씬 더 안전하게 굳건히 지키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백성들은 한 사람의 지도자가 없어서 실패한 것으로 생각하나, 실상 그들이 실패한 주원인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그를 향한 순종이 결여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2:1-3). 7:1-5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7족속을 다 쫓아낼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이라 하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가나안인들의 영향을 받아 종교적, 사회적, 윤리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말고 구별된 삶을 살고, 세상을 다스리고 정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렇지 못할 때 교회도 이들처럼 타락과 부패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한편 사사들은 영적으로, 군사적으로, 민사적으로 백성을 지도한 자들입니다. 사무엘상까지 포함하면 모두 17명의 사사가 언급되고 있는데, 이 중 어떤 이들은 용사요(옷니엘, 기드온), 제사장이요(엘리), 선지자(사무엘)입니다. 이들 모두가 합쳐져서 그리스도의 세 가지 직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모든 선조들 위에 뛰어나시어 궁극적인 선지자요, 제사장이요, 왕이 되신 것입니다. 오늘 교회시대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어 교회를 통치하시고 교회를 통하여 세상을 다스리시고 계십니다.

2> 소견에 옳은 대로 사는 삶의 결과입니다(17-21).  본문 17-21장을 보십시다. 2125절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을 표준으로 삼지 않고 각각 자기의 생각과 기준을 삶의 표준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사사시대 당시 사람들은 옳은 것과 그른 것에 대한 기준을 자기의 소견에 두었습니다. 그 결과로, 이들은 자신의 규칙대로 살았습니다. 그들의 유일한 삶의 기준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타락한 인간의 죄된 본성이 삶의 나침반이었습니다. 사사기의 타락상은 그 나침반을 따른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떠난 삶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스라엘은 종교적 배도와 사회적.도덕적 부패로 파멸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입니다. 종교적 배도입니다(17-18). 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 하는 사람이 한 신상을 부어 만들고 신당을 차렸고,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어 한 아들을 세워 제사장으로 삼았습니다(17:1-6). 그리고 또 한 레위인을 해마다 돈을 주며 제사장으로 삼았습니다(17:7-13). 이는 종교적 타락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제사장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라 아론의 자손만이 제사장이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상을 만들어 숭배한 것은 그 시대의 영적 무지와 혼란상을 보여줍니다. 사사시대의 사람들은 각자 자기 생각에 옳은 대로 하나님을 예배하였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순수한 여호와 신앙을 상실한 채 이교도의 우상숭배적인 행위로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스라엘 자손의 신앙의 상태는 뒤죽박죽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여호와께 대한 신앙이 존재했고, 동시에 가나안의 우상숭배도 존재했던 것입니다. 적용>오늘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교회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직분을 돈으로 사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내심으로는 탐욕에 눈이 어두워서 명예, , 권력 등을 우상으로 섬기고 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사회적.도덕적 부패입니다(19-21). 어떤 레위 사람과 그의 첩과 이스라엘 내전에 관한 이야기가 19-21장에 적나라하게 실려 있습니다. 아마도 성경에서 한 레위인과 그의 첩에 관한 사사기의 이 사건보다 더 섬뜩한 이야기는 없을 것입니다. (부언설명) 레위인의 첩이 베냐민에 속한 기브아의 불량배에게 윤간을 당한 후 죽자 레위인이 이 죄의 사실을 전 이스라엘 지파에게 알리고자 그 죽은 첩의 시체를 12덩이로 나누어 이스라엘 사방에 보냈습니다. 이 일로 이스라엘 자손이 미스바에 모여 논의한 결과 베냐민 지파가 있는 기브아의 불량배를 처단하기로 하였으나 이들을 내어 주지 않고 오히려 이들을 두둔하면서 베냐민 자손이 온 이스라엘 자손과 싸우고자 하여 결국 이들 간의 전쟁이 있었고 베냐민 자손이 멸절되는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20:1-21:4) 이에 멸절 위기에 있는 베냐민 지파를 살리기 위해 두 번의 악행을 저지릅니다. 길르앗 야베스 주민을 쳐 죽이고 이들 중 처녀 400명을 베냐민 남자들의 아내로 주고, 또 여호와의 명절에 실로 여자들이 춤을 추러 나올 때 이들을 납치해서 아내로 삼게 했던 것입니다(21:5-23). 이 과정에서 폭력, 동성애, 집단 강간, 살인, 시체유기 등의 온갖 죄악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신앙을 빙자하여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신앙을 빙자한 불신앙의 모습입니다. 신앙인의 불신앙! 이 얼마나 무서운 자기기만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이라 하면서도 정작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지 않을 때에 이와 같은 자기기만에 빠지는 모순을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창조주 하나님이시요, 구속자 여호와이신 만왕 중의 왕이 엄연히 살아 계신 목전에서 스스로 왕 노롯하였던 것입니다. 적용>오늘날 우리는 우리 사회 속에서 깊고 넓게 퍼져 있는 온갖 죄악과 부도덕과 불의를 볼 때, 우리 자신의 시대도 사사 시대와 많은 점에서 유사하다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 성도들도 얼마든지 자기 소견을 따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 되지 못하고 불평불만, 시기 질투 등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고전12:25-27). 과연 우리는 그러한 심각한 질병들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 것인가? 충분히 치유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을 왕으로, 하나님이 제시해준 말씀의 기준대로 살기로 헌신한다면, 그분은 죄로 황폐하게 된 우리의 심령과 사회를 말끔히 고치실 것입니다. 이상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을 떠나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사는 자들의 삶이 이렇게 부패하여 파멸의 길을 걷게 되었으므로 이 길에서 떠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 것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3>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입니다(7:12-16, 28;1-14).   7:12-16, 28:1-14절을 보십시다. 우리의 말과 판단과 행동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면 우리의 삶은 여러 면에서 질서를 잃게 되고 영적인 타락과 더불어 세상은 혼란을 겪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름이 아니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름이 아니요, 내 육신의 생각을 따름인 줄로 믿습니다. 86절과 13절에서는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내가 가진 사고와 생각의 틀 안에서 생각하고 판단할 것이 아니라 내 개인적인 육신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을 따라 행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잠언은 하나님을 섬기는 삶의 기술을 가리킬 때 지혜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말하자면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방식에 맞춰서 살아갈 수 있는 기술과 능력을 갖춘 사람입니다. 성경의 지혜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근본으로 삼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지혜의 원천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 곧 경건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존경을 표하는 삶이야말로 진정 지혜로운 삶인 것입니다. 이런 지혜로운 삶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게 합니다. 말씀을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복이 있습니다(7:12-16, 28:1-14).

말씀을 마칩니다. 사사시대 당시 사람들은 옳은 것과 그른 것에 대한 기준을 자기의 소견에 두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로 사사시대의 사람들은 자신의 규칙대로 살았습니다. 그들의 유일한 삶의 기준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일예> (내로남불) (받을 돈과 줄돈)// 그결과 타락과 부패의 극치에 이룰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도 사사시대와 다를 것이 없이 무법이 난무하는 시대입니다. 종교적, 사회적, 윤리 도덕적으로 얼마나 타락한 시대인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병든 이 시대와 인간들의 심각한 질병으로부터 치유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요? 충분히 치유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이 제시해 준 말씀의 기준대로,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살기로 현신한다면, 그분은 죄로 황폐하게 된 우리의 심령과 사회를 말끔히 고치실 것입니다(15:26, 7:12-16, 28:1-14).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많은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주셨습니다. 왜 주셨을까요? 우리를 속박하고 얽어매기 위함일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교통신호법은 안전한 교통으로 우리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요. 사회의 여러 가지 헌법을 비롯해서 민법 상법 형법 등 다양한 법들이 존재하는 것은 우리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고 다른 사람들의 권리를 존중해 주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많은 법을 만드신 것도 똑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통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구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죄를 피할 수 있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율법은 사람들에게 선하고 공정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한 뜻이 무엇인지도 알려 줍니다. 따라서 그것은 우리 삶의 나침반으로서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왕으로 모십시다. 내 중심으로 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 중심으로 삽시다. 말씀에 순종하며 삽시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릅시다.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산다(8:13)고 했습니다. 살고자 하십니까? 죽고자 하십니까? 이것이냐 저것이냐? 선택은 여러분의 몫입니다.